사실 나는 물리를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우리에게 모자라는 직관력을 보완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방법을 터득하고는 이 방법을 이용하여 내 연구에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매료되었었다.
전산물리라는 과목이 아직 그 틀을 잡지 않았을 때 나는 이 과목을 개발하고 가르칠 임무를 자청하여 맡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내용을 전산물리로 잡아야 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국(미국) 에서는 이미 여러 대학에서 이 과목이 개설되고 영문 교과서도 몇 권 나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렇다할 표준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내 연구 경험에서 얻은 하나의 성과인 컴퓨터 그림(computer graphics)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리를 이해하는데 그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과목의 중요 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이 과목에서는 물리에 있어서 컴퓨터 그래픽스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컴퓨터의 2세대 (50년대) 까지는 그래픽스란 개념이 컴퓨터에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제 3세대에서부터 컴퓨터의 일반화가 실현되면서 점차 그래픽스가 컴퓨팅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컴퓨터 게임이 많이 보급되고 대중의 환호를 받자 그래픽스는 맹렬한 기세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인터넷 월드와이드웹이 퍼지면서 그림 없는 컴퓨팅이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물리에 있어서 그래픽스는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려면 항상 뉴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많은 위대한 인물을 생각하면 경이롭다고 한다. 뉴턴 역시 돌이켜 생각하면 경이롭고 신비하다.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 학생일 때 런던에 퍼진 유행병으로 학교가 임시 폐교하자 고향인 울스소프에 내려와 지낸 2년 동안에 그의 생애의 모든 업적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회고하고 있다. 그 젊은 나이에 그 짧은 시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그 뉴턴의 능력은 신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뉴턴을 연구한 많은 과학사가(historians of science)는 뉴턴의 그 신비한 능력의 원천을 그의 집중력과 직관력에 있다고 보고 있다. 직관력이란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그 답을 미리 알아내는 힘을 말한다.
사실 답을 알고 나면 그 답을 이끌어 내는 논리적 추론은 쉽게 이룰 수 있다. 뉴턴은 바로 이 답을 미리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능력은 다름 아니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능력을 말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서 정보를 추출해 낸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오직 뉴턴과 같이 특출한 인물만이 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제 컴퓨터가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바로 컴퓨터 그래픽스이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컴퓨터 그래픽스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내 이야기에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바둑에서 수읽기를 한다고 한다. 바둑알을 놓기 전에 미리 전략을 짠다. 이렇게 놓으면 저렇게 놓고 저렇게 놓으면 이렇게 놓고 하는 식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를 짜고 그래서 최종결론을 내고는 바둑알을 반상에 내려놓는다. 그때 머리 속에는 바둑알이 바둑판에 놓여지고 그림이 짜여진다. 그러나 범상한 사람은 몇 수 안되어 그림이 흩어져 깨끗하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러나 최고의 기량을 가진 전문 기사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그림을 그려서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 언젠가 조남철씨가 쓴 글에서 일본에서 기성으로 통하는 오청원씨는 50수를 내다 보고 한 수를 두었다며 그 한 수를 풀이한 기보를 읽은 일이 있다. 50수 앞을 머릿속에 그려본다는 것은 보통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서운 집중력과 직관력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능력이다.
그런데 컴퓨터는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컴퓨터를 옆에 놓고 바둑을 두게 허용한다면 머릿속으로는 그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수를 놓아 보고 오청원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상당히 향상된 기량으로 바둑을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범상한 사람도 프로기사에 육박하는 실력을 발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에 있어서 컴퓨터 그래픽스는 바로 우리에게 모자라는 이 직관력을 그래픽스를 통하여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각적 정보는 소리정보(말)보다 백배 낫다는 말이 있다. 예부터 내려 오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글자까지도 포함한다. 글로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 보다 그림을 한번 그려 보여 주면 그것이 전달하는 정보가 훨씬 크다.
과학교육에 있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일반화 되어왔다.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말 또는 글만 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언어란 아직 그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다. 오직 수학만이 나름대로의 수식이라는 언어 체계를 구축하여 우리의 일상 언어와 달리 수학적 진리를 기술하는 "언어"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문가 사이에만 통용되는 "언어"이지 평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학생들에게 수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그림이 자주 동원된다.
그림의 특성은 정보를 줄 뿐 아니라 그림 자체가 보는데 즐거움을 준다. 어린이가 글로 된 책보다 그림책을 좋아 하는 것은 보는 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언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소설책이나 신문의 연재소설들은 이른바 삽화라는 것을 넣어서 읽기에 지루해 하는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더 해 주었다.
초창기의 웹(Web)은 문자 문서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그러나 웹이 보편화 되자 이제는 그래픽스가 없는 웹 페이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은 웹 디자인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에 더하여 이제는 정적인 그림대신 움직이는 그래픽스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움직이는 그래픽스, 즉 motion graphics 라는 것이 정적 그림에 싫증난 웹 페이지 방문객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rollover나 인터랙티브 모션 그래픽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대화형 시뮤레이션(Interactive Simulation)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웹디자이너에게 팻션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터랙티브 시뮤레이션이란 이미 게임 풀그림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기법으로 도입된지 오래다. 미국 워싱톤주 레드몬드시에 있는 Digipen 이라는 대학의 학과는 그 이름이 RTIS (real time interactive simulation)로 실시간 대화형 시늉내기인데 게임프로그래머를 양성하는 학과이다. 미래는 이제 RTIS로 가고 있다.
물리와 RTIS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나는 정년을 맞기 몇 년 전부터 물리교육의 개선을 줄곧 주장 해 왔다. 칠판에 분필을 써서 강의하던 구식 교수법은 이젠 접을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방법은 수백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 보다 나은 교수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를 이어 전수되어 왔을 뿐이다. 인터랙티브 시뮤레이션은 학생 스스로가 가상실험을 해 보고 그림을 그려 보게 해 준다. 이젠 단순히 보조 그림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황에 맞게 그림을 스스로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물리를 가장 빨리 이해시킬 수 있는 최선의 교육방법인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아니라 백견이 불여일행인 것이다. 한번 해 보는 것이 백번 정적인 그림을 쳐다보는 것 보다 나은 것이다.
이처럼 물리에 있어서 RTIS는 교육의 보편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플래시는 이러한 교육용 무른모를 제작하는 데에 더 할 나위없는 훌륭한 도구라는 점이다. 내가 플래시에 매료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물리로 배우는 플래시”(http://phya.snu.ac.kr/~kclee/lects/index.html)는 이러한 교육의 새로운 매체를 개발한다는 정신으로 플래시 풀그림을 짜 오고 있다.